윤동주와 카라벨로브 시 속의 고향



야니짜 이바노바 (소피아대학교 '성 클리멘트 오흐리드스키')

 

1. 들어가는 말

 

일본 식민지 시대 (1910-1945)를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또 일제 암흑기 (日帝暗黑期), 일제 식민 통치 시대 (日帝植民統治時代), 일본 식민지 시대 (日本植民地時代), 일본 통치 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 (日政時代), 왜정 (倭政時代), 대 일본 전쟁기 (對日本戰爭期), 대일 항쟁기 (對日抗爭期), 국권 피탈기 (國權被奪期)라는 명칭 이 많으나 이 모든 이름은 같은 상황 즉 일본이 한국 땅을 소유해서 식민지를 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가리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에 국권을 피탈(14세기 – 19세기)당해서 어려운 시기를 겪은 적이 있다. 현재는 불가리아 터키 식민지 시대를 “터키 지배”, “멍에”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터키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 시대를 “불가리아 영토에 터키인 머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식민지를 부인해도 불가리아인 시인과 작가들의 고통이 그 시대의 작품 속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어서 자유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통해 터키인들이 불가리아 국가에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본고에서는 식민지 시대 자유를 상실한 상황 속에서 문인 윤동주와 카라벨로브가 어떤 방법으로 상실한 고향을 표현했는지에 대한 비교 연구이다.

 

2. 윤동주의 생애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이 말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1942년)의 서(序)에서 정지용이 한 말이다 (이건청, 1995:130).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대표 시인으로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났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기까지 한국문학사에는 알려지지 않은 문인이었다. 그는 문단 밖의 사람이었고 만일 1948년 그의 초판 시집 “하늘과 별과 시”가 발간되지 않았더라면 윤동주를 시인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시로써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고 역사에도 흔적을 남긴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다.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형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주의 위로 딸이 둘 있었으나 나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동주는 윤씨 집안의 장남인 셈이었다.  명동촌은 농촌이기는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 선각자들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종교와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특히 1890년 회령에서 이주해 온 김약연 선생은 청국인에게서 땅을 구입하여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명동서숙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 중학교를 설립 발전시켰다. 이 학교는 고향 산천을 버리고 쫓겨온 조선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보금자리였다 (이건청, 1995:133). 

김약연 선생은 1909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기도 하였다. 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1875-1947) 역시 1910년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규암 김약연 선생과의 관계는 매우 긴밀해질 수 있었다. 규암 김약연 선생이 선비로서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면 동주의 할아버지 유하현은 실질적인 면에서 매사를 추진하고 집안과 교회 그리고 마을 일까지도 원만하게 이끈 분이었다. 

그런 집안에 태어난 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였고 그가 소학교에 재학하던 무렵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한창일 때이고 또한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이 간도, 특히 명동촌을 중심으로 퍼져 가던 때였다. 1931년 3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생 14명을 위하여 학교에서는 졸업 선물로 김동환 시집 „국경의 밤”을 마련하였다. 나중에 동주가 명동촌에서 10리 동남쪽에 있는 대립자라고 하는 곳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을 더 다니고 졸업하였다.  

중국인 소학교를 마치고 동주는 용정의 은진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학교에 입학한 후 온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를 하였다. 첫번째 이유는 정치적이었는데 공산주의가 종교를 거부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일본이 강요하는 새로운 체제 속에서 동주의 아버지 나이의 사람들이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도시밖에 없었다. 

은진 중학교에 다닐 때 동주는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그때 당시 간도 지방의 한국 학생들은 외지 특히 고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큰 꿈이었던 것 같다. 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숭실 중학교로 옮겨 갔다. 다음해 봄에 시사참배 문제로 숭실 중학교가 폐교되기까지 약 7개월간은 동주가 문학에만 전념한 기시였던 듯하다. 학교가 폐교가 당하자 동주는 신문 스크랩을 하거나 시상에 잠겨 원고지와 씨름하는 것이 일과가 되어 있었다.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가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1938년 4월 9일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동주는 국내의 많은 문인들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국내 시인으로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 등에 감명을 받고 있었으며, 발레리,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 콕토 등의 외국 시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키에르케고르 등에 몰두해 있었다. 

1942년 일본에 건너가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그 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 다케다 아파트에서 하숙하면서 독서에 열중하였다. 1942년 겨울 방학에 집에 오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일제에 의해 징병제가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해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그는 체포되었다. 죄목은 ‘독립운동’이었다. 그때 일본 유학 중에 쓴 상당 분량의 시와 산문을 일어 번역을 시켰다. 그 후 동주는 2년, 송몽규는 2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3. 카라벨로브의 생애 

 

불가리아 작가 중에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서 살았던 작가로 류벤 카라벨로브를 들 수 있다. 여기서 같은 시기라는 것은 같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 작품을 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터키 식민지 끝날 무렵에 태어난 카라벨로브는 1834년에 불가리아 코프리브쉬티짜 도시에서 태어나 터키 식민지 밑에 살고 있는 불가리아 사람의 고통을 보고 외국에 가서 외국에서 시와 신문 기사를 쓰며 불가리아 국민들의 정신을 일깨워 봤다. 

카라벨로브는 코프리브쉬티짜의 작은 학교를 다니다가 16살때 대도시인 플로브디브에 있는 그리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서 외국 문화를 접하게 되고 불가리아 사람들의 심한 빈부차이를 느끼게 되었다. 

23살때부터 사업가인 아버지하고 터키 제국을 돌아다니며 사업을 해 봤지만 윤동주와 같이 언어,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그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1857년도에 카라벨로브가 모스코바에 군사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과목에 관심이 없어서 계속 언어 수업만 들었다. 바로 거기서 러시아말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먼저 불가리아 민담, 속담, 전통, 전설, 미신, 이름, 문법, 불가리아어 사전까지 포함하는 ‘불가리아 민족 전통기념’이라는 책을 쓰고 나중에 쓰기에 자신이 생겨 개인 소설과 시를 쓰기 시작하며 나중에 그 작품을 러시아어로 “불가리아민족의 고통에 대한 책에서 몇 페이지”라는 작품집에 모아놓게 되었다. 

카라벨로브는 25살때부터 계속 외국에서 살게 되었다. 먼저 러시아에서 살다가 베오그라드로 도망가야 되었는데 1868년도에 세르비아 정치가가 살인을 당했을 때 카라벨로브를 체포해서 7개월 동안 수감시켰다. 

1869년 카라벨로브는 부쿠레슈티로 가서 다른 불가리아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불가리아를 위해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았다. 거기서 흐리스토 보테브라는 불가리아 유명한 시인이며 운동가를 만나 두 사람이 불가리아 ‘독립’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레브스키라는 독립운동가를 만나서 둘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불가리아 사람들의 터키에 대한 정책에 대해 의논을 나누곤 했다. 

1874 년에 카라벨로브가 완전히 정치를 버리고 문학 작품만 쓰겠다고 선언을 했으나 2년 후에 불가리아에 큰 반란이 일어나고 다시 독립 운동에 몰두하였다. 터커-러시아 전쟁 때 러시아 군대를 위해 통역을 하고 1878년에 불가리아의 독립을 보게 되었으나 1년 후에 폐결핵에 걸려 해방된 조국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4. 윤동주와 카라벨로브의 문학 작품 비교

 

카라벨로브와 윤동주가 식민지말에 살았고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며 먼 국가, 고향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며 작품을 쓴 사람들이다. 이건청에 의하면 윤동주가 조국 해방 불과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 마디소리를 지르고 그는 운명하였다고 한다. 29세의 나이로 육신을 버리기엔 너무나 그리운 것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빼앗긴 내 나라가, 고향 마을의 부모형제가, 아니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이런 것들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건청, 1995:142). 카라벨로브도 자유를 잃은 국가를 위해 큰 사랑을 품고 있었다. 1878년 불가리아 해방 후 고향인 코프리브쉬티짜에 돌아가게 되었을 때 옛날에 다녔던 학교를 다시 방문하였고 거기서 오래된 발칸 반도 지도의 한 부분을 떼어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자기한테 너무 귀중한 것이라 지도에서 불가리아 부분을 떼었다고  설명하였다 (스토야노브, 2008:130) .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 소학교의 가장 중요한 과목은 조선 역사, 조선어였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러 민족정신을 드높였다. 이런 영향은 후에 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후 나타나는데 조선어 학점이 100점으로 나타나는 등 확고한 민족정신을 나타내 보여 주게 된다 (이건청, 1995:134). 그 다음에 연희 전문에서 최현배 선생에게서 조선어와 민족 의식을, 손진태 교수의 역사학 강의를 통하여 한국사의 비극적 운명을, 그리고 이양하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문학의 본질과 시인의 마음가짐을 배웠다. 연희 전문 졸업을 앞두고 동주는 촌조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발악적인 일제의 탄압 정책과 전운이 감도는 세계 정세, 그리고 일본 유학, 이 모든 것들이 여린 감성의 동주에게 비장감마저 느끼게 한 것 같다. 그 당시에 씌어진 작품들은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 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자화상’, ‘새로운 길’ 등 으로 윤동주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42년대에 릿쿄 대학에 입학한 동주가 그 해 여름 방학을 이용해 고향에 돌아온 것이 동주의 마지막 귀향이 되었다. 고향집에 돌아온 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물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이건청, 1995: 140)

동주는 연희 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시고 3부를 만들었다.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고는 19편으로 되어 있으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 있으며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 있다. 

윤동주는 10여 세까지는 해환(海煥)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밑이 달환 (윤일주)이고 그 밑으로 나이 어려 죽은 동생 이름이 별환이었다. 이렇게 ‘해’와 ‘달’과 ‘별’을 이름자의 첫자에 넣어 지은 것이었다. 동주가 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육필 시집을 엮게 되고 또한 그런 대상들을 지극히 사랑하게 되는 것도 전혀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건청, 1995:134) 

류벤 카라벨로브는 시보다 소설을 많이 썼다. 가장 잘 알려진 장편 소설은 소설은 ‘옛 불가리아인”, „하지 니초”, „부자인 가난한 사람”, „마마보이” 등이고 단편소설로는 „독립운동가”, „스토얀”, 그 외에 기사와 문예란과 시들이다. 카라벨로브의 시가 소설과 기사에 비해 그렇게 많지 않으나 그의 시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 국가의 자유를 선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 윤동주와 카라벨로브가 그린 고향의 의미 

 

카라벨로브는 나라를 위해 싸워야 된다고 늘 강조했다. 그런 생각이 그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얌전한 착한

아이였을 때 

나 힘나고 생력이 있는 

작은 사내아이였는데 

지금은 나 할아버지 되었고 

아버지 하나였고 

자식도 하나: 

자유야, 자유야! 

 

노예로 살아왔고, 

고통 받았다. 

그래도 안 죽었고 

내 뜻이 있었다. 

불가리아를 떠나여

세계를 돌아다니며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자유롭게 부르기 위해 

자유야, 자유야! 

 

형제를 잠에서 깨워서 

일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터키인들에게 

자기 재산을 안 주도록 한다. 

그리고 이웃이 

노예로 살지 말고 

나와 똑같이 

용기 있게 부르도록 

자유야, 자유야!  

 

그런데 모두가 자고 있고 

모르는 척 하네. 

하나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또 하나가 상관이 없다고 

모두가 공짜로 받고 싶고 

남의 입으로 하고 싶은데 

이 거룩한 단어: 

자유야, 자유야! 

 

형제야, 내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 주마. 

나는 지금 아프고 

힘이 빠지네! 

내가 죽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한 귀한 마디만 

나에게 이야기해서 

저승에 그 단어를 나 가져 가도록

자유야, 자유야! 

   

              -'라코브스키의 노래' 전문

 

라코브스키가 불가리아 독립운동가였는데 사람을 모아 놓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 외에 라코브스키가 기사와 소설을 쓴 문인이다. 이 시에 '나'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다. 고향이라는 곳을 소중히 여겨서 자유를 요구를 하는데 형제들의 반응이 그 반대이다. 고향에 사람이 있어도 나는 완전히 혼자이고 도와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자기 목적, 뜻을 도와 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에 빠져서 외국을 돌아다니며 계속 울며 예언하는 성경책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국민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유를 보고 싶은 그 마음이 아주 간절한데 희망이 안 보이니까 힘을 잃고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은 상황이다. 그 만큼 고향의 자유가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 고향이란 인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고 그의 기본이 되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뿌리가 필요하고 그 뭔가 없이 못 살아가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시 속의 상황은 나의 근원, 그것 없이 못 사는 것은 바로 이 나라의 자유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윤동주의 시에 인생의 근원이 좀 막연하게 나와 있으나 그것도 바로 상실한 진짜 고향이라고 추측할 수가 있다. 윤동주 시 속의 '나'가 그 근원을 열심히 찾고 있으며 넘치는 고독, 갈 데가 없는 의미 가지는 시 ‘길’을 살표볼 필요가 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도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길’ 전문

 

‘길’에서 윤동주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방황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는다는 모습을 보면 나가 잃어버린 것은 소유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이후에 행동이 좀 어색하다. 그 뭔가를 찾기 위해 모르는 먼 길을 다니고 있으나 이 길이 담을 끼고 뻗어 있는 길이다. 담 위의 푸른 하늘이 넗은 공간을 암시하여 주지만, 길을 막는 담으로 하여 잃은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을 그것을 찾기 전에 나가 완전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뭔가, 자기 기본이 되는 것을 찾아야 된다. 이 시에 나가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다. 혼자서, 땀을 끼고, 아침에서 저녁으로 통행하고 있지만 담으로 막혀 있다. 그 뭔가가 사람의 기본, 사람의 뿌리, 기원, 근원 즉 진짜 마음의 고향일 수밖에 없다. 

고향을 그리는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가 “또 다른 고향”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 시에도 진짜 위로를 줄 수 있는 고향을 찾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 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자. 

 

- ‘또 다른 고향’ 전문

 

 

윤동주는 자신의 고독과 정면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흰 뼈를 보게 되고 끝내는 쫓기는 의식 속에 지니게 된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간 나는 백골 즉 같이 있어주는 누가를 느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화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때문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고 있는 실체가 막연하다. 

‘지조 높은 개’도 그 고독을 도와 주는 입장이다. 고향에는 누군가가 있으나 그 누군가가 나와 없는 관계가 된다. 개는 어둠을 향해 짖고 있고 누운 방도 우주와 통해 있다. 모두가 시대적인 조류나 풍조 속에 동화되어 가더라도 끝까지 도망하고자 하는 굳은 다짐이 나타나 있다. 

이 시에 나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나서 성장한 실제의 고향일 수도 있겠으나 추억의 세계 하나의 원초적인 귀의처로서의 고향일 수도 있다. 동주의 고향인 북간도의 명동촌이라는 실재하는 고향의 테두리를 벗어나 고향의 의미가 확산되어 쓰인 것이다. 

그 고향에는 ‘눈물 짓는 나’, ‘백골인 나’ 그리고 ‘아름다운 혼인 나’로 분화된 시인의 의식도 돌아갈 곳을 잃는다. 이 시에 고향이란 슬픔의 장소, 계속 거기서 살 수 없는 장소로 그려져 있다. 

 

카라벨로브의 시 중에 ‘나의 숲’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나의 숲

젊음의 향이 나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속에 

슬픔만 이르키네. 

 

한번 너를 보는 사람이 

계속해서 울게 된다. 

당신의 그늘 밑에 

못 죽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너를 

떠나야 될 때 

평생 살아 있을 때까지 

너를 잊을 수 없네. 

 

 아름다운 나의 숲

젊음의 향이 나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속에 

슬픔만 이르키네. 

 

                  - ‘아름다운 나의 숲’ 부분

 

문학 작품이 시대의 산물이고 카라벨로브가 산 시대가 터키식민지 말기이자 그의 시들이 처절한 절규이고 보면 카라벨로브의 시에 대한 연구는 마땅히 시대와 연결하여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독립운동가로 체포된 이래 적지인 형무소에서 7개월 동안 보낸 것을 살펴보면 그의 불운이 그의 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살피는 것은 가장 적절한 방법인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 의미를 알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연구해야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의 시를 살펴보면 숲은 단지 하나의 아름다운 숲이 아니라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기서 살고 싶고 위안과 기쁨을 찾고 싶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장소도 역시 언젠가 떠나야 될 곳이고 계속 마음 속에 깊은 추억을 남기는 장소이다. 그 숲의 의미는 단지 하나의 장소가 아이라 잃어버린 젊음의 추억이기도 한다. 원래 사람이 자기의 어린 시절을 고향에 보내는 것이다. 젊음의 시절이 돌아올 수가 없듯이 이 시에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편안한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자 사람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기만 한다. 

 카라벨로브가 자기 고향의 밀밭도 슬프게 표현한다: 

 

나의 밭, 

내 금밭

누가 밭을 갈 거야, 

나의 거룩한 밭? 

 

풀이 많이 나고

가시 나무, 잡초만 났네

식민지 지도자들만 

너를 파 왔다. 

 

- ‘밀밭’ 부분

 

나가 고향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고향에 밀밭이 금색으로 빛나고 있고 거룩하기까지 하지만 그 땅을 자기 외에 사랑하는 이가 없다고 그 시 속에 뒷부분에 표현을 한다.  고향에 적들만, 식민지 지도자들만 모여 있어 자기가 그 땅을 일구기 위해 못 가고 밀밭에 풀과 잡초들만 자라나게 된 것이다. 나가 먼 데에서 아무것도 못 하며 고향을 그리우며 형제들이 도와 달라고 소리를 치지만 반응이 없다. 자기 먼 땅에 고독에 빠져 그 밀밭의 자유를 열심히 찾고 있다.  

 

5. 결론

윤동주와 카라벨로브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이 식민지 시대때 수감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시정신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시정신은 시대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았다. 시대나 역사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통절히 깨닫고 아파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역사의 제물로 송두리째 받쳤다. 그러한 치열한 시정신의 뒤에는 시인으로서의 양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정신이란 순수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저항정신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가 있다. 동주와 류벤 카라벨로브가 아름다운 표현으로 자신의 속 마음을 들어내고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을 표시하였다. 고향은 떠나야 될 것이고 깊은 고독과 슬픔을 일으키는 하나의 먼 땅이지만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열심히 인생의 근원이듯이 열심히 찾는 장소이다. 

 

참고문헌

 

김윤식 외: «우리 문학 100년», 서울: 현암사, 2001. 

신용협: «현대한국시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4. 

이건청: «윤동주», 문학세계사, 1995. 

이반 스토야노브: „류벤 카라벨로브. 그 생애와 활동의 새로운 부분” (Любен Каравелов. Нови щрихи към живота и дейността му), 트르노보: 트르노보대학출판사, 2008. 

„자유” (Свобода), 2년 7호, 1871년 2월 13일. 

«지식» (Знание), 1년, 9호, 1875년 5월 15일. 

«한국현대문학사», 신동욱 편저, 집문당,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