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스토 보테프의 시 연구



김소영 (소피아대학교 '성 클리멘트 오흐리드스키')

 

1. 들어가는 말

불가리아 문예부흥기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과 지배로  서유럽에 비해 늦게 시작되었으며 성격 상도 다소 차이를 보인다. 서유럽의 문예부흥은 신 중심의 세계관으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문화적 교양 발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불가리아 문예부흥은 중세기의 종교와 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서유럽의 문예부흥과 동일하지만 인간 중심보다는 민족과 국가 중심을 기본 개념으로 한다. 불가리아 문예부흥기는 민족의식 형성, 민족 문화 창조와 국가 해방 투쟁의 역사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계몽정신과 국가 독립을 위한 저항의 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발표되었으며 이렇게 불가리아 문학은 종교 중심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변모한다. 불가리아 문예부흥기는 1762년 파이시 힐렌다르스키 신부의 저서인 ’슬라브 불가리아사’ 발표를 기점으로  그의 제자인 소프로니 브라찬스키, 네오피트 릴스키, 에마누일 바스키도비츠 등이 파이시 힐렌다르스키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작품을 발표하며 발전한다.

불가리아의 문학사 학자인 스베틀로자르 이고프는 불가리아 문예부흥기를 크게 두 단계로 나눈다.  첫번째 단계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계몽기로 교육, 인쇄, 서적 및 잡지 출판 등으로 문화와 문학 발전의 기본적 틀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 시기 문학은 주로 교육, 교훈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새로운 문학 장르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두번째 단계인 1840년부터 1860년까지에는 시, 소설 같은 새로운 문학 장르가 도입되어 문학이 예술로서 발전을 이룬다. 이 시기에 활동한 주요 문인으로는 나이덴 게로프, 도브리 친툴로프, 페트코 슬라베이코프, 도브리 보이니코프, 바실 드루메프, 루벤 카라벨로프, 흐리스토 보테프 등을 들 수 있다.

이 논고에서는 불가리아 문예부흥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 흐리스토 보테프의 삶과 그의 작품 속의 나타난 시 정신을 분석하여 혁명가인 보테프가 문학을 통해 어떻게 저항운동을 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흐리스토 보테프의 생애 

흐리스토 보테프는 불가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 받고 사랑 받는 민족혁명가로 불가리아 문예 부흥기를 대표하는 저항 시인이며 독립투사였다. 그는 터키 식민지 말기 28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그의 저항 정신과 애국심은 아직까지 불가리아인의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리아에는 흐리스토 보테프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길, 도서관, 라디오 방송국, 체육관, 출판사, 도시 등이 수없이 많이 있다.

흐리스토 보테프는 1848년 12월 25일, 하이투틴의  은거지인 발칸산맥에 기슭 칼로페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험난한 삶을 예시라도 하듯 그는 불가리아 국교인 정교의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명절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그런 연유로 그의 이름도 '흐리스토스'  본 떠 '흐리스토'라고 짓는다. 그는 오데사에서 러시아 신학문을 공부한 교육자 보툐 페트코프와 전통 민요를 잘 불렀던 그 당시 전형적인 불가리아 여자 이반카 페트코바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흐리스토 보테프는 후에 자신의 아버지를 '보통의 아버지 개념을 뛰어 넘은 고귀한 존재'로, 아홉 명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불가리아 민족의 형상이 투영된 조국을 상징하는 존재로 묘사하면서 부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한다. 

보테프는 칼로페르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1863년 플로브디프 주재 러시아 부영사인 나이덴 게로프의 도움으로 오데사로 유학을 떠난다. 오데사의 중등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지만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1865년 결국 퇴학당한다. 그 후 계속 오데사에 머물면서 폴란드의 독립 투사들과 접하게 되고 러시아의 혁명 민주주의자인 헤르젠, 체르니쉐브스키, 도브로류보프의 사상도 배운다. 1866년 가을 그는 오데사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며 베사라비아에서  불가리아 이주민을 가르친다. 그러나 1867년 아버지가 병환으로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칼로페르로 돌아간다. 그 해 칼로페르에서 보테프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격동적인 봄을 맞게 된다.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발칸산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혁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1867년 가을 보테프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오데사로 돌아가는데 중도에 루마니아에서 활동하던 불가리아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루마니아 브라일라에 남아서 디미터르 파이즈코프의 출판사에서 출판 일을 거들며 독립군에 합류해 혁명을 일으킬 그 날을 기다린다. 이 시기 보테프는 '작별'이라는 시로 어머니와 가족에게 이별을 고하며 자기희생을 불사하고 조국의 독립를 쟁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결국 그는 불가리아 독립군에 합류해 불가리아로 떠나지만 다뉴브 강을 건너기도 전에 독립군 대장이 체포되어 혁명의 꿈은 무산되고 만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보테프는 계속 루마니아에 남게 되는데 그는 그때 불가리아 최고의 독립투사 바실 렙스키와  만난다. 후에 보테프는 자신의 마지막 시 '바실 렙스키의 처형'에 독립 투사의 처참한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담는다. 이 시기 보테프는 활발한 문필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한다. 루마니아로 이주한 불가리아인들이 만든 출판물 '북'과 '자유'의 발간에 동참하고, 1871년에는 '불가리아 이주민의 소리'라는 자신의 신문을 발행한다. 1872년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투옥되기도 하지만 카라벨로프와  쩨노비츠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1873년에는 '자명종'이라는 새로운 신문을 발간하였고 1873년부터 1874년 사이에는 카라벨로프의 신문 '독립' 발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시와 문예기사를 투고한다. 1874년 12월에는 자신의 세번째 신문 '깃발'을 발행하는데 이 시기 보테프는 카라벨로프와 혁명에 대한 이념적 갈등에 부딪혀 결국 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렇게 보테프의 극단적인 혁명 투쟁의 길을 택하고 카라벨로프는 계몽적이고 교화적인 문필활동을 계속 이어나간다. 1874년 보테프는 '불가리아 중앙 혁명 위원회'에 가담하지만 1875년 9월 다른 위원들과의 의견 충돌로 위원회에서 탈퇴한다. 이 시기 보테프의 문학 작품은 절정기를 맞게 되면서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보테프의 유일한 시집인  '보테프와 스탐로프의 노래와 시' 도 바로 이 시기에 발간된 것이다.

1875년 보테프는 베테타 라쉐바와 결혼하고 그 이듬해에 이반카라는 딸을 얻지만 혁명과 조국 해방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적인 삶을 거부하고 혁명 투사로서의 길을 걷는다. 1876년 4월 20일 '4월의 항쟁'이  시작될 즈음 보테프도 러시아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독립군을 조직한다. 그리고고 자신의 마지막 신문 '신 불가리아'를 만들어 '4월의 항쟁'을 알린다. 그 해 5월 9일 보테프는 200명의 동지들을 이끌고 '4월 항쟁'에 합류하기 위해 '레데쯔키'호를  타고 불가리아로 떠나지만 4월 항쟁이 실패한 후 불가리아에 도착하여 터키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전장에서 숨을 거둔다. 보테프는 순국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에게 '나는 나의 민족을 가장 사랑했고 그 다음으로 당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기억해라...'라는 편지를 보내 죽기 전까지도 조국을 위한 사랑과 자기 희생에 대한 굳은 신념을 전달했다.

3. 흐리스토 보테프의 작품 세계

흐리스토 보테프의 첫 작품 '어머니께'는 1867년 '가이다'  신문에 발표되었고, 그의 나머지 작품들은 '다뉴브의 새벽', '자유', '독립', '불가리아 이주민의 소리', '자명종' 등의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의 시는 총 20편으로 1867년부터 1875년까지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발표되었지만 그는 천재적 자질을 가진 불가리아 문예부흥기 최고의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시 외에도 언론인으로 평론, 논설, 문예, 풍자적 글 등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였다.

 

3.1. 형식상 특징

보테프 작품은 불가리아 문예부흥기의 다른 작품처럼 전통 민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민요를 들으며 민요와 함께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민요의 요소가 첨가되어 있다. 불가리아 전통민요는 음절의 수에 따라 리듬이 정해지는데 보테프의 시의 운율도 민요의 리듬을 받아들여 일정한 음절 수가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형성된다. 예를 들어 보테프의 시 '작별'을 보면 불가리아 민요에서 가장 즐겨 쓰는 여덟 개(5개+3개)의 음절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가리아 민요 

Li-lya-no mo-me, + Li-lya-no,

5                3

Ya Sta-ni ra-no + pri-zo-ri

Ya Sta-ni ra-no + pri-zo-ri

Ta li-be-to si + po-sre-shtni...

 

보테프의 시 '작별'

Ne pla-chi, may-ko, + ne tu-ji,

5                 3

che sta-nah a-zi + hai-du-tin,

hai-du-tin, mai-ko, + bun-tov-nik,

ta te-be kle-ta + o-sta-vih...

3.2 내용상 특징

 

불가리아 평론가 블라디미르 바실레프가 흐리스토 보테프를 '자유에 대한 절대적 사상을 가진 문인'이라고 평가한 것처럼 보테프의 시에는 암흑적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메시지가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현실의 구속과 억압의 굴레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쟁취하려는 그의 투쟁은 글로 뿐만 아니라 투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는 더 격렬하고 직설적이며 날카롭다. 보테프 이전 '자유를 위한 투쟁 정신'을 시화시킨 문인으로는 도브리 친툴로프(1823-1846)로 그는 약 20편의 시를 남겼다. 또한 그는 뛰어난 음악 감각으로 자신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으며 멜로디화된 그의 시는 민중 사이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의 노래는 바실 렙스키 등 많은 혁명 운동가들에게 혁명가로 널리 사용되었다.

나의 민족과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자유와 조국을 위해

모든 피를 쏟아 붓자

우리를 탄압하는 자로부터

간교한 저 회교도인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 ‘진실한 민족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부분

 

발칸의 아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깊은 잠에서 깨어나라

불가리아인들이여, 터키인들에게 

맞서 싸워서 승리를 거둬라! 

- ‘발칸의 아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부분

① 사랑과 증오 속에서의 갈등과 고뇌

보테프하면 불가리아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말은 ‘열렬히 사랑하고 증오하라’다. 이 말은 보테프의 ‘작별’에 있는 한 구절로 보테프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와 그의 불 같은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랑’과 ‘증오’라는 두 상반 개념은 보테프의 모든 시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보테프는 자서전적 내용을 담은 자신의 시에서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머니! 제겐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제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모든 악한 마음을 버리고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안아 주고 싶습니다' ('어머니께'), '오, 나의 사랑, 아름다운 여인이여!'('작별'). 그러나 보테프는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을 조국과 민족에 대한 숭고한 사랑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라고 하며 개인적인 감정을 강하게 거부한다. ‘이제 당신에 대한 사랑을 멈추려고 합니다' ('어머니께'), '이런 사랑 노래는 이제 그만해라, 내 심장에 독극물을 붓지 말아라' ('내 첫사랑에게')라는 구절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며 자기 희생을 감수하려는 시인의 자기희생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보테프의 숭고한 '사랑'은 피폐한 식민지 현실에 부딪히며 터키인들의 억압과 잔인함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대한 억압과 구속에 대해 증오를 표현하는 동시에 불가리아 사회 내의 특정 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서도 강렬하게 비난한다. 보테프의 시 ‘애가‘에서는 피지배자인 불가리아 민중을 ‘멍에를 쓰고 족쇄를 찬 불쌍한 노예’로 표현하였고 그들의 가혹한 시련을 ‘비석 위로 흘러내리는’ 피땀, ‘생살을 관통한’ 십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뼈를 부식시키는’ 녹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지배자인 터키인과 함께 불가리아 사회 내의 착취자를 통틀어서 ‘민중의 삶을 빨아먹는 거대한 뱀’에 비유하고 ‘우리 손님과 남의 손님이 민중의 피를 빨아 먹는다’며 ‘남의 손님’인 터키인뿐만 아니라 ‘우리 손님’인 불가리아 사회 내에 존재하는 착취자의 악랄함을 강력하게 비난한다. 또한 사회 기득권 층을 부자, 성직자, 지식인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터키인들과 함께 불가리아 국민을 억압하는 같은 족속으로 묶어 ‘선택 받은 오합지졸 가축 떼’라고 비난한다. ‘술집’이라는 보테프의 시에서는 이런 사회 특권층을 배고픈 민중을 갈취하는 ‘야비한 부자’, ‘금에 목마른 상인’, ‘신성한 예배를 드리는 신부’로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지배자인 터키인들은 ‘갖은 횡포를 부리고, 치욕을 주고, 목을 따서 죽이고, 교수형을 시키고, 때리고, 욕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압제자’라고 강렬하게 비난하며 혹독한 식민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② 불가리아 국민의 수동성에 대한 분노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와 사회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지배자와 착취자에 대한 보테프의 증오는 불가리아 국민들의 수동적인 자세와 부딪히며 분노로 바뀐다. 식민지 체제 하에서 500년 동안 현실을 묵인한 채 체념상태로 침묵하며 살고 있는 불가리아 국민에게 각성을 촉구하며 지배자의 억압과 잔혹행위에 맞서서 조국의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라고 호소한다. 보테프는 수동적인 불가리아 국민을 ‘가축 같은 민족’, ‘멍청이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강한 환멸감과 분노를 표출한다. 

 

불쌍한 백성들이여, 대답해다오, 내게 대답해다오

누가 노예의 그네에 당신들을 태워놓고 흔들고 있는가를.

(중략)

저 사람들이오? 말해보시오. 백성들은 말이 없다!

육중한 족쇄 소리만 소름끼치게 철거덕거리고

저들에게서 자유의 소리는 전혀 들을 수가 없구나

- ‘애가’ 부분

‘애가’에서는 보테프 시의 특유의 대화체 형식으로 반복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불가리아인들을 질책하며 500년의 긴 식민지 생활에서 이제는 깨어나라는 간절한 메시지를 보낸다. 식민지 상황을 ‘노예의 그네’와 ‘육중한 족쇄’에 비유하며 구속과 힘겨운 고통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신의 민족의 수동성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③ 현실 인식에 대한 절망과 고독감

보테프는 외롭게 홀로 투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깊은 절망감과 고독을 느낀다.

명랑한 내 모습을 보는 사랑스런 동지들,

그들과 함께 나도 웃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나의 젊음이 서리발에 얼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이 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친구가 없습니다

사랑할 친구도, 제 마음 속을 열어 보일 친구도,

제 꿈과 생각과 제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친구가 제게는 없습니다.

- ‘어머니께’ 부분

어리석고 몽매한 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구나

- ‘형제에게’ 부분

 

‘어머니께’에서는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즐거워하는 동지들사이에서 자신의 고통과 꿈을 나눌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께 고백하며 자신의 젊음을 서서히 꺼져가는 불꽃과 서리발에 얼어가는 것으로 비교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시한다. ‘형제에게’에서는 침묵하며 수동적으로 사는 불가리아인을 어리석고 몽매한 자라고 비난하며 그들 속에 홀로 투쟁는 시인의 외로움과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④ 저항 정신과 숭고한 자기 희생 정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분노과 함께 고독감을 느끼며 고통과 번민 속에서 갈등하지만 보테프는 결국 자유를 되찾기 위해 혁명을 일으킬 것을 호소한다. 

 

자유에 대한 살아 숨쉬는 사랑을 위해

민족의 원수에 대항하여 모두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싸워라

(‘나의 기도’ 중에서)

 

보테프는 자유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살아 숨쉬는 사랑으로 표현하며 모든 국민이 독립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압제자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만이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 강조하며 혁명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라고 외치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싸울 것을 호소한다.

또한 자신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자기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표현한다.

 

젊은 나이에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이젠... 더 이상 상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언젠가 내 민족에게 말하겠습니다:

어느 불쌍한 사람이 정의를 위해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었다고.

- '작별' 부분

 

자유를 위해 투쟁하다 죽은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늘, 땅, 맹수, 

자연이 모두 통곡을 하고

사람들은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 ‘하지 디미터르’ 부분

 

죽음이 있는 그 곳에는 따뜻한 미소가

차가운 무덤에는 달콤한 휴식이 있다

- ‘나의 첫사랑에게’ 부분

 

‘작별’에서는 불가리아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자신의 죽음을 예시하며 자유를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고, ‘하지 디미터르’에서는 불가리아 독립투사 디미터르의 죽음을 슬퍼하며 혁명가의 죽음은 고귀한 것으로 죽음으로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나의 첫사랑에게’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따뜻한 미소와 달콤한 휴식으로 연관시키며 자신과 같은 독립 투사들이 죽음으로 조국 독립을 이룰 것을 확신하고 있다.

 

4. 맺는 말

불가리아의 국민 영웅으로 현재까지 추앙 받고 있는 흐리스토 보테프, 그의 삶은 짧지만 파란만장했다. 불가리아가 500년이라는 긴 터키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보테프와 같이 시대를 앞서 가는 사고와 애국심을 가진 독립투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테프는 혁명가로 직접 터키군에 맞서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문예부흥기의 대표 시인으로 불가리아 문학이 종교와 신 중심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문학으로 발전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보테프는 러시아에서 유학하며 새로운 사상을 배우고 다른 나라의 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혁명만이 자신의 조국과 민족이 오스만제국의 탄압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글뿐만 아니라 행동으로서 독립운동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언론인으로서 평론, 논설, 풍자적인 글을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하였으며 직접 신문을 만들기도 했다. 

보테프의 시정신은 ‘사랑과 증오 속에서의 갈등과 고뇌 - 불가리아 국민의 수동성에 대한 분노 – 현실 인식에 대한 절망과 고독감 – 저항 정신과 숭고한 자기 희생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배자인 터키인들의 억압과 탄압에 대한 강한 증오로 바뀐다. 그는 식민지 지배라는 국가적인 구속과 함께 불가리아 내의 특권 계층의 횡포와 착취라는 사회적인 구속에 대해 혐오감을 표출하며 강하게 반발한다. 그리고 피지배자인 불가리아인의 체념적 자세와 수동성에 분노를 터트리며 그들 속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심한 고독감을 느낀다. 그러나 보테프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찾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글을 통해 표현한다. 

그는 직설적인 표현과 남성적인 톤으로 지배자의 잔혹함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피폐한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불가리아 대표 민족시인이다.

불가리아 시인 보테프의 삶과 그의 시 세계에 대한 본 연구를 토대로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저항시인과 오스만제국 식민지 시대 저항시인의 삶과 시정신을 비교 분석하는 것을 향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참고문헌

 

니콜라이 겐체프,「불가리아 문예부흥기」, 이스토크-자파드, 2010.

도초 레코프, 「불가리아 문예부흥기 문학 (1, 2권)」, 소피아대학교 출판사, 1993.

디미터르 미하일로프, 「흐리스토 보테프의 시와 산문」, 벨리코 터르노보, 1992.

류멘 게오르기에프,「불가리아 문학사의 대표 작가」, 페텍스-레텍스, 1992.

발레리 스테파노프, 「불가리아 문학 - 세기」, 아누비스, 2003.

스베토자르 이고프, 「불가리아 문학사 개요」, 소피아대학교 출판사, 2005.

이반 그라니트스키, 「흐리스토 보테프의 나의 기도」, 자하리 스토야노프, 2008.

흐리스토 보테프, 「전투 (1, 2권) 」, 자하리 스토야노프, 1998.

 I. Bolilov, V. Mutafchieva, K. Kosev, A. Pantev, S. Gruncharov,「불가리아 외래어사전」, 불가리아 국립 학술원, 1970.

Tsv. Minkov, B., Angelov, St. Bojkov, 「Bulagarian Literature」, Narodna prosveta, 1962.

 

<부록>

 

어머니께 

어머니, 당신께서 그리 슬프게 우셨습니까?

당신께서 3년 동안 저를 원망하셨습니까?

온갖 증오스러운 것과 부딪히며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저를 탓하셨습니까?

 

제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습니까?

아니면 당신께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까?

어머니, 제 푸르른 젊은 날이 말라가고 

처절한 고통으로 시들어갑니다?!

 

명랑한 내 모습을 보는 사랑스런 동지들,

그들과 함께 나도 웃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나의 젊음이 서리발에 얼어가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이 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친구가 없습니다

사랑할 친구도, 제 마음 속을 열어 보일 친구도,

제 꿈과 생각과 제게 고통을 주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친구가 제게는 없습니다.

 

어머니! 제겐 당신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제 사랑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멈추려고 합니다. 제 심장은 시꺼멓게 타버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와 둘이서 행복과 영광을 누리는 꿈을

수 십 번 수 백 번 꾸었습니다

끓어 오르는 열기로 아주 많은 것을 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이제 이 모든 바램을 묻어버릴 구덩이를 파 주세요!

 

오직 한가지 한 가지 바램만 남았습니다:

이 젊은 심장이, 이 상처 받은 영혼이 

당신의 따뜻한 품 속에 안겨서,

불쌍한 당신께 이 운명을 한탄하고 싶습니다...

 

모든 악한 마음을 버리고 이제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안아 주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 심줄이 굳어버리고

무덤 속에서 제 육신이 썩어도 괜찮습니다!

 

작별 

어머니, 제가 독립투사가 되었다고

울지도 슬퍼하지도 마세요,

어머니, 독립투사, 반란자! 

장남 걱정에 늘 가슴 졸인 

당신을 홀로 남겨 두었습니다!

어머니, 젊은이들을

고통스런 외국 땅으로

추방시켜 떠돌게 만든

추악한 터키인들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세요.

잔인하고 비열하고 야비한 자들!

어머니, 저는 내일이면 

저 고요하고 잠잠한 

다뉴브 강을 건널 것이고

그러면 젊은 나이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렇기에 제가 당신께 그리 소중한 아들이겠지요!

어머니,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신께서 저를 이렇게 용감하고 혈기 넘치는

남자로 낳아 주시질 않았습니까?

따뜻한 우리의 보금자리,

제가 태어나서 자라고

처음으로 젖을 물었던 그 곳,

사랑하는 제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검은 눈으로

애절한 눈으로 제 심장을 울리던 그 곳,

아버지와 형제들이 저 때문에

검게 타들어 가던 그 곳,

그곳에서 미쳐 날뛰는 저 터키인들을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오, 어머니, 위대한 어머니!

용서하세요, 이제 용서하세요!

민족의 부름을 받고

간악한 적군에 대항하여

총을 매고 뛰어갑니다.

이제 어깨에 총을 매고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과 아버지와 형제를 위해

모두를 위해 적의 포로가 되겠습니다.

칼과 정의가 지시하는 대로

싸우겠습니다, 위대한 어머니!

어머니, 마을에 총성이 울리고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어머니, 그때 당신의 아들이 

어디 있는지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만약 제가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해도

어머니, 울지 마세요,

사람들이 저를 '불한당'이라고 

욕해도 귀담아 듣지 마세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셔서

어린 제 동생들에게

그들에게 어떤 형이 있었는지,

그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두 알려 주세요.

터키인들에게 굽히는 것을

참지 못했던 불운아였고,

고통의 굴레를 견디지 못했던

그들의 형을 기억하라고 전해주세요, 어머니!

저를 기억하라고, 기억하라고 전해주세요

바위 틈과 암독수리들에게 찢긴

제 흰 살점을 찾으라고 전해 주세요.

제 피로 땅은 검게 물들겠지요.

어머니, 검은 피!

제 총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제 총과 칼,

원수를 만날 때면

그 총으로 인사를 했고

그 칼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었습니다...

어머니, 만약 당신의 마음이 아파서 

이 말을 동생들에게 전하지 못한다면

처녀들이 우리 집 앞에서 

모여 춤을 출 때를 기다리세요.

제 친구들도 오고

제 애인도 친구들과 함께 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도 제 어린 

동생들과 함께 나와서

저의 장렬한 노래를 들으세요

제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

죽기 전에 동지들 앞에서

무슨 말을 남겼는지

어머니, 당신은 신나게 춤추는 

젊은이들을 슬프게 보겠지요,

사랑하는 제 애인과

당신의 눈이 마주치면,

이 가련한 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뱉겠지요,

어머니, 당신과 그녀!

두 여인의 눈물이 늙은 가슴과,

젊은 가슴 위로 흐르겠지요...

제 아우들은 나중에 이해하게 될 겁니다

어머니, 제 아우들이 성인이 되면

저처럼 될 것입니다

열렬히 사랑하고 증오할 겁니다...

어머니, 오, 어머니, 만약에

제가 건강하게 살아 돌아간다면,

깃발을 손에 들고 건강한 모습으로

멋진 군복을 입고

이마에 금빛 사자 배지를 달고

길고 가는 총을 어깨에 매고

허리에 뱀모양의 칼을 차고

장한 동지들과 살아 돌아 간다면

오, 어머니, 강인한 당신이여!

오, 나의 사랑,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때 마당의 꽃을 꺾어

담쟁이와 이질풀을 뜯어

화관과 꽃장식을 만들고

우리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고 

총에는 꽃을 꽂아 주세요

어머니, 그리고 당신은 제게 오셔서,

빨리 오셔서, 저를 안아주세요

고귀한 서약, '자유와 죽음'이란

두 글자가 새겨진 이마에

그 아름다운 이마에 키스를 해 주세요!

피 묻은 속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안으면 

그녀는 제 심장 뛰는

소리를 듣겠지요.

키스로 그녀의 울음을 멈추고,

입술로 그녀의 눈물을 삼키고...

그러나 ... 어머니,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여인아, 나를 잊지 마오!

무장대는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난다

영광스럽지만 고통스런 길을 떠난다

젊은 나이에 저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상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언젠가 내 민족에게 말하겠습니다:

어느 불쌍한 사람이 정의를 위해서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었다고.

 

바실 렙스키의 처형 

오, 나의 어머니,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왜 그렇게 비통하고 슬프게 우나이까?

까마귀야, 이 저주받은 새야,

너는 누구의 무덤 위에서 이렇게 흉하게 울어대느냐?

 

어머니! 아, 알겠어요,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검은 노예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 우시는군요.

아, 어머니, 당신의 그 성스러운 목소리가

의지할 곳 없이 공허하기 울리기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실컷 우세요! 소피아 근처 그 곳에서

저는 검은 밧줄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가리아여, 당신의 아들이

무서운 힘으로 밧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겨울은 사악한 노래를 부릅니다.

들판의 가시넝쿨과 

추위와 혹한과 절망의 흐느낌을

당신에게로, 당신의 가슴으로 폭풍이  휩쓸고 옵니다!

 

까마귀는 소름 끼치게 울어대고,

들개와 늑대는 안개 속에서 긴 울음을 토해내고,

늙은이들은 간곡하게 기도를 드리고,

여자들은 흐느끼고 아이들은 악을 써댑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바로 당신의 압제자가

용맹한 이 땅의 아들을 땅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오, 나의 어머니,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를 위해서 울어주고 이 삶을 저주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