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문학의 흐름

(고대부터 근대까지)

 

Yanitsa Ivanova
Sofia University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문학이 어느 시기에 이르러 새롭게 변모되어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는 각 시대의 상황과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보편타당한 근거나 객관성의 확보가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결국 이 문제는 각 시대 문학인들의 문학에 대한 인식과 태도, 작품에 표출된 세계관과 미의식 및 문학 향유 계층의 가치 지향 등이 어느 시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른 경향을 띠고 있는가를 살피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산물이기에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함께 문학도 변화한다. 문학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새롭게 변화하였는가는 그 시대의 상황과 문제점 그리고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다.
불가리아문학의 기원은 슬라브족의 그리스도 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가리아 약사
      불가리아 지역의 선조는 주로 트라키아인이었고, BC 15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AD 6~7세기경 북쪽에서 이주하여 온 슬라브인이 발칸반도 전체를 점유하였으나, 7세기 후반에 들어와 볼가강유역의 거주민 투르크족 불가리아인이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불가리아와 슬라브 두 민족의 혼합국가인 제1불가리아왕국(681~1018)이 탄생하였다.  불가리아 제국은 비잔틴제국과 오랫동안 전쟁을 하면서 마찰을 빚었으나, 양국 간에 문화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865년 비잔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불가리아의 그리스도교 개종은 865년 보리스 1세가 왕실과 국교로 로마 가톨릭교 대신 동방정교회를 채택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정치적 결정과 함께 비잔틴과 가깝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불가리아는 발칸 지역에서 슬라브족 최초의 문자와 고대 불가리아 문학으로 알려진 교회 저술서를 발달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 내부적으로 봉건적 관계도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시메온 제왕(893~927) 시절에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투르크 타타르계의 주민과 원주민인 슬라브인의 혼혈이 계속되는 가운데 10세기가 되자 반(反) 봉건운동인 보고밀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났다. 1018~1185년 동안에는 비잔티움제국에 정복되었으나 1185년 북부 도시 트르노보를 중심으로 한 봉기에서 승리하여 제2불가리아제국 (1186~1396) 을 성립시켰다. 봉건체제의 붕괴는 실현되었지만 남쪽 터키에서 발흥한 오스만 투르크족에 굴복, 1393년부터는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투르크는 불가리아의 귀족을 살해하고 이 지방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500년간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어 불가리아의 독립이 지연되었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세력의 약화를 틈타 몇 차례의 민족 봉기가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876년 불가리아 민족해방 투쟁이 재현되어 다시 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촉발된 제정러시아 - 투르크의 전쟁 (1877~1878)의 결과로 불가리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자신들의 불가리아적 정통성을 지키게 되었다.

키릴 문자 
 그리스문자의 언셜 자체 (초서체)를 기본으로 하고 슬라브어에 많은 치찰음(齒擦音)과 파찰음(破擦音)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추가하였다. 슬라브계의 여러 언어를 표기하는 데 오랫동안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러시아문자의 모체가 되었다. 키릴 문자는 동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빌라루스와 몰도바,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부 지역, 크로아티아 일부 지역, 루마니아일부 지역, 불가리아, 마케노디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일부 지역(압하스/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몽골에서 쓰이는 문자이다.
        현재의 키릴 문자는 초기 키릴 문자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이 문자는 글라골 문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글라골 문자는 동방 정교회의 선교사 성 키릴로스(끼릴)와 그의 형 성 메토디오스 (메토디)가 슬라브족에게 포교하기 위해 그리스 문자를 바탕으로 고안되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이 이론이 부정되고 있다. 이들이 키릴 문자를 개발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논쟁이 있다. 비록 키릴로스가 키릴 문자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가 글라골 문자에 기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을 것이다.
불가리아가 개종하자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제자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차르시메온(927 죽음)과 페트르(969 죽음)의 제국 수도인 프레슬라프에 최초의 슬라브 문학학교(893~971)를 세웠다.
 또한 데볼과 오흐리트에서도 포교활동을 벌인 결과 슬라브족 최초의 유명한 '대학교'가 생겨났다. 이 대학교의 창립자 성 클레멘투스는 지금의 소피아대학교 수호성인으로서 '클리멘트 오흐리드스키'라 불린다.
 

고대 불가리아 문학
고대 불가리아 또는 불가리아의 황금시대라 불리는 이 무렵의 중세 문화는 '황제의 도시'(슬라브인들은 차리그라드라 불렀음), 즉 콘스탄티노플의 문화와 맞먹을 정도로 융성했다. 이러한 사실은 총주교 요안 엑자르흐 (요안 주교)의 〈6일 Shestodnev〉(헥사메론, '창조의 6일'이라는 뜻)에 넌지시 언급되어 있다.
차르 시메온 자신의 이름은 그의 〈시메온의 (성서 주석) 모음집 Simeonov sbornik〉에 관한 저술, 그리고 그리스의 수도사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안 즐라토우스트)의 저술을 최초로 슬라브어로 번역한 〈황금시대 Zlatostruy〉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 슬라브 문학에서 그리스 원전 번역(즉 슬라브어화)이 담당한 중요한 역할은 슬라브 방언을 발전시키고 구조와 어휘를 통해 비잔틴 사상의 모든 복잡성과 미묘함을 전달하려는 불가리아 저자들의 의지를 반영해준다.
이 시대와 다음 시대에 제일 유명한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Konstantin Kiril Philosof, Metodii, Vladislav Gramatik, Matey Gramatik, Kliment Ohridski, Naum Ohridski, Konstantin Preslavski, Yoan Rilski, Evtimii Turnovski, Grigorii Tsamblak, Kipriyan Tsamblak 등이다.
 
중세 불가리아 문학
중세 불가리아의 13~14세기, 혹은 은시대는 아센 왕조와 시슈만 왕조가 집권한 시기로 필사본에서 지극히 묘사적인 기교(서체•편집•도안•제본)가 발달했다.
1345년 바티칸본 〈마나시이 연대기Manasieva hronika〉, 1356년 런던본 〈차르 이반 알렉산드르 복음서 Londonsko chetveroevangelie na tsar Ivan Alexander, 1355-1356)〉등이 좋은 예이다.  내용 역시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잔틴의 영향과 그리스 원전 번역을 풍부한 문학적 자료로 삼고 있다.
 역사적•시사적 주제를 주로 다루던 아센 왕조 때의 취향은 14세기말에 이르러 '내면의 빛'을 추구하는 이시카슴의 신비주의적 교리로 바뀌었다.
 
트르노보(킬리파레보 수도회 학교로 유명함)의 테오도시우스와 그의 가장 탁월한 제자 총대주교 예프티미 (1404경 죽음)가 이 교리를 내세워 트르노보 문학파를 이끌었고 고대 교회 슬라브어의 9, 10세기 형태를 보존하면서도 그 전통을 표준화, 순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중세 불가리아 문학의 종말까지는 아니더라도 퇴보를 말해주는 특징이 나타났는데, 바로 현대적 여행기라고 하는 기묘한 장르의 등장이다. 이 여행기의 주제는 성자들의 유골을 트르노보에서 차르 이반 스트라치미르가 있는 비딘까지, 혹은 더 서쪽으로 운반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리 짬블라크와 코스테네츠의 ('철학자') 콘스탄티누스 같은 불가리아의 학자들도 서쪽으로 이주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기예와 전통을 함께 가져갔다.
 초기와 후기 중세 불가리아 문학의 마지막 후예인 이들과 함께 교회 슬라브어의 실질적 유산인 필사본 또한 종종 이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련된 교회문학적 전통은 불가리아(더 넓게는 발칸과 슬라브)의 문화 배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또다른 문학의 흐름, 즉 성서적•역사적•이교도적 토양으로까지 광활하게 넘쳐 흐르면서 발칸의 전설들을 고전적•그리스도교적•경외서적 주제로 가득 채웠던, 덜 세련되고 뚜렷이 경전외적인 중세 문학의 흐름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이 흐름 가운데는 교회와 왕실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불가리아 보고밀 이단의 교조적•경외서적 저작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작품은 교회와 정부 당국을 자극해 코즈마 장로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차르 보릴의 1211년 종교회의 소집의 동기가 되는 등 활발하고 유익한 반응을 초래했다.
고대 불가리아 종교문학과 통속적인 문학전통 모두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는 불가리아의 전통적인 수호성인이자 처음 수도원을 창시한 릴라의 성 요한의 이야기들을 들 수 있다.
 통속화된 이야기들 이외에 주목할 만한 것은 총대주교 예프티미가 쓴 〈우리의 가장 거룩하신 아버지 릴라의 요안(요한네스) 일대기 Life of our Most Blessed Father Yoan of Rila〉와 블라디슬라프 그라마티크가 쓴 〈릴라 이야기:성 요안(요한네스)의 유골을 릴라 수도원으로 옮긴 이야기 Rila Story:Conveyance of St. Yoan's Relics to the [Refounded] Rila Monastery〉 등이 있다.
 
불가리아 18세기 문학
근대 불가리아 문학은 19세기 중엽 민족의식의 각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새로운(즉 근대적인) 불가리아 문학어 '노보불가르스키'가 만들어졌다. 이 새 문학어는 그때까지도 문학적 목적에 사용되어온 중세 교회 슬라브어에 대립하는 것으로 동부 방언의 토속어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 시대에 제일 유명한 작가는 Hristo Botev, Dobri Voynikov, Sophronii Vrachanski, Vasil Drumev, Rayko Zhynzifov, Lyuben Karavelov, Konstantin Miladinov, Vasil Popovich, Grigor Purlichev, Georgi Rakovski, Petko Slaveikov, Stephan Stambolov, Paisii Hilendarski, Dobri Chintulov 등이다.
 새로운 언어, 노보불가르스키의 선구자들은 근대 불가리아에서 처음 인쇄된 서적 〈주일서 Nedelnik〉(1806)의 저자인 주교 소프로니 브라찬스키 (브라차시의 소프로니)와 문법학자이자 1835년 근대 불가리아 최초의 학교를 설립한 네오피트 릴스키 (릴라산의 네오피트), 불가리아 최초의 중요 사전을 편찬한 나이덴 게로프, 러시아 골동품 연구가 유리이 베넬린, 그밖에 바씰 아프릴로프, 이반 보고로프 등이다.
 
불가리아 각성 시대
이러한 민족의식의 각성(브즈라주다네[Vuzrajdane]로 알려짐)에 전초 역할을 한 사람은 힐란다리의 파이시 (파이씨이 힐렌다르스키) 신부였다. 그의 유일한 저서 〈슬라브 불가리아의 역사 Istoria slavyanobulgarska〉(1760-1762)는 불가리아의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민족 자존심에 호소함으로써 불가리아의 문예부흥에 불을 당겼다.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최초의 역량 있는 근대작가들은 종종 시인•학자•정치평론가•혁명가로서의 능력을 겸비했으며 서로 다른 문학적 업적을 통해 소생하는 국가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
 당시의 여러 상황, 즉 자유의 결여, 강력한 그리스 문화의 지배, 러시아 공리주의의 영향 등은 대부분 오데사나 모스크바에서 교육받은 이들 작가들에게 문학은 반드시 사회적•국가적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이렇게 감화된 작가들, 도브리 보이니코프, 일리야 블르스코프, 특히 류벤 카라벨로프와 바씰 드루메프 등은 농촌과 소도시의 삶을 주제로 한 서술체 산문과 드라마를 창작함으로써 근대 불가리아의 사실주의를 창시했다.
 자유와 조국이라는 이상에 일편단심 헌신한 흐리스또 보테프는 정열적인 혁명시를 썼다.
 불가리아의 언론인이자 성서번역가이며 불가리아 독립 관구 설정을 선동했던 페트코 슬라베이코프는 카라벨로프나 보테프처럼 망명하지 않고 평생을 불가리아•마케도니아•이스탄불에서 살면서 민간전승과 그리스 민요를 바탕으로 시를 썼다.
그리고 전형적인 '부즈로주데네츠'(vuzrozhdenets:르네상스인/ 각성 시대인)인 게오르기 라코프스키는 다재다능하고 생동력 넘치는 작가로서, 당대와 그 이후 불가리아 작가에게 2가지 주요한 고유 자원이었던 화려한 중세적 과거와 풍부하게 보존된 민간전승을 신중한 정도를 넘어서 열광적으로 탐구했다.

해방 이후 문학 
1878년 불가리아가 해방되자 투르크가 지배한 이전 5세기보다 훨씬 유리한 문학 발전의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 시대의 작가들은 다음과 같다: Mara Belcheva, Dimitar Boyadzhiev, Konstantin Velichkov, Dimcho Debelyanov, Ivan Yonchev, Aleko Konstantinov, Stoyan Mihaylovski, Ekaterina Dimitrova Nencheva, Tsvetan Radoslavov, Pencho Slaveykov, Zahary Stoyanov, Anton Strashimirov, Petko Todorov, Teodor Trayanov, Kiril Hristov, Peyo Yavorov, Hristo Yasenov 등이다.
이반 바조프는 작가로서는 거의 단독으로 해방 이전과 이후의 시대를 연결해준다. 1870년대초부터 1921년까지 쏟아져나온 그의 방대한 저술은 모든 주요 장르에 걸쳐 자기 민족의 삶의 모든 단면, 과거와 현재 등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로써 그는 '민족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연작 서사시 〈잊혀진 자들에게 바치는 서사시 Epopeya na zabravenite〉(1881~84)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독립투쟁의 많은 영웅의 혼을 불러들이고 있다. 중편소설 〈아저씨들 Chichovtsi〉(1895)은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불가리아 지방 '유지들'의 사실주의적 초상화와 같은 작품이다.
그의 서술적 재능은 불가리아의 '국민소설'로 알려진 〈멍에 Pod igoto〉(1893)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소설은 투르크에 대항한 불가리아인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은 흥미진진하며 불가리아의 역사와 지방을 다룬 여행기는 독자들의 견문을 넓혀준다.
 그의 가장 인기있는 희곡 〈후쇼베 Hushové〉(1894)는 해방 전에 국외로 추방된 사람들이 루마니아에서 겪는 수난을 묘사하고 있으며, 중세 불가리아를 배경으로 한 그의 다른 드라마들과 함께 소피아 국립극장(1907 창설)에서 자주 상연되었다.
 콘스탄틴 벨리치코프는 바조프만큼 상상력과 종합 능력이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의 시적 자질은 콘스탄티노폴과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여러 소네트에 잘 표현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영향력을 대표하는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회고문학에도 이바지했다.
 회고문학의 대표작가는 자하리 스토야노프이며 그의 〈불가리아인들의 봉기 기록 Zapiski po bulgarskite vustaniya〉(1883~85)은 이후 불가리아 산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진솔한 문체로 동시대 역사적 변동의 현장체험을 기록한 작품이다. 새로운 독립국가의 작가들은 먼 과거 혹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기리는 일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으며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판의 눈길을 돌렸다.
 스토얀 미하일로프스키는 풍자•우화•경구 등을 통해 공직자의 부패를 냉엄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장 야심적인 풍자 〈불가리아 국민에 관한 책 Kniga za bulgarskia narod〉(1897)은 도덕철학적 알레고리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보다는 가벼운 필치로 썼던 알레코 콘스탄티노프는 〈바이 가뉴 Bay Ganyu〉(1895, 부제는 '불가리아 현대인이 유럽 여행과 국내에서 겪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에서 '벼락부자'이자 민중 선동가로 변신한 불가리아 농부의 희비극적 원형을 창조했다.
 그는 여행기 〈시카고 왕복기행 Do Chicago i nazad〉(1894)에서 유럽•미국의 문화와 불가리아를 비교 평가했으나 항상 유럽과 미국이 더 앞섰다고 하지는 않았다.
 1890년대에 이르자 중견작가들은 편협함과 사회정치적 호전성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려는 신예작가들의 도전을 받았다.
 여기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미학적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가리아 최초의 비평가인 크르스티오 크르스테프가 창간한 평론지 〈미슬 Misul〉('사상'이라는 뜻, 1892~1908)이었다. 
〈미슬〉 그룹의 한 사람인 펜초 슬라베이코프는 불가리아 시의 낭만주의 전통을 확장했고 복잡한 시어 창조에 공헌했다.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정신적 업적의 위대함을 찬양했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간 정신의 소유자들, 단테•베토벤•셸리•레오파르디 등에 관한 작품, 〈서사가요 Epicheski pesni〉(1896~98)를 썼다.
 
근대 문학
펜초 슬라베이코프의 사상은 여러 평론과 자전적 성격의 시선집 〈축복받은 자들의 섬에서 Na ostrova na blazhenite〉(1910)에 표현되어 있다.  이 시선집에 수록된 '경외서적' 시들은 가공의 시인들이 그 저자로 되어 있다.
 한편 그의 이야기체 시 〈보이코 Boyko〉(1897)•〈랄리차 Ralitsa〉(1893)는 민속적 주제를 심리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며,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그의 최대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피의 노래 Kurvava pesen〉(1913)는 불가리아의 역사와 운명에 관한 서사시이다.
 불가리아 낭만주의 단편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진 페트코 토도로프는 슬라베이코프보다 더 확고하게 문학의 자기만족성을 신봉했다.
 민간전승의 영향을 받은 일련의 산문시 〈이딜리이 Idilii〉(1908)와 발칸의 신화를 바탕으로 쓴 몇 편의 드라마, 특히 〈프리메이슨 Zidari〉(1906)은 그의 섬세한 시적 재능을 보여준다.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전위문학 사조는 서유럽 시단의 상징주의 운동과 관련된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었다. 키릴 흐리스토프의 시는 〈황혼에 부치는 찬가 Himni na zorata〉(1911)에 드러나 있듯이 아나크레온풍의 여유와 서정적 힘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 〈미슬〉 그룹의 일원인 페요 야보로프는 시어로서 불가리아어가 갖는 음악적•표현적 잠재력을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부단한 정신적 발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드라마도 대단한 가능성을 보였지만 진정한 업적은 서정시에서 이룩되었다.
 야보로프의 감화력은 딤초 데벨랴노프의 음악적이고 감각적인 시에서 발견된다. 데벨랴노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죽음으로써 지식인들의 비극적 좌절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상징주의는 니콜라이 릴리예프와 테오도르 트라야노프의 전후(戰後) 시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리얼리즘 전통은 안톤 스트라시미로프와 게오르기 스타마토프 등의 작품에서 면면히 이어졌으며, 이들의 냉소적 소설은 수도 소피아의 사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스트라시미로프는 당대 사회를 날카롭게 꿰뚫어 본 작가로 농부들의 삶에 관한 일련의 단편, 특히 〈코찰로보의 싸움 Kochalovskata kramola〉(1895)과 장편소설 〈가을의 날들 Esenni dni〉(1902)•〈교차로 Krǔstopǔt〉(1904)•〈만남 Sreshta〉(1908), 그리고 희곡 〈흡혈귀 Vampir〉(1902)•〈장모 Svekǔrva〉(1906) 등을 썼다.
 그와 동시대를 산 엘린 펠린은 〈이야기들 Razkazi〉(1904, 1911), 비극적 중편 〈게라크 일가 Geratsite〉(1911)•〈토지 Zemya〉(1928) 등에서 기지와 박애심이 깃들인 필치로 고향 농촌의 모습을 묘사했다.
 요르단 요프코프는 소설가이자 극작가로서 전쟁의 파급효과를 묘사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의 초기 걸작 〈같은 고향 사람들 Zemlyatsi〉(1915)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의 단편소설 〈발칸 전설 Staroplaninski legendi〉(1927)•〈안티모보 여관의 저녁 Vecheri v Antimovskiya han〉(1928)은 불가리아 정신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서술문학의 고전적 정수를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좌익 문단은 비극적으로 요절한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대표되는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게오 밀레프와 흐리스토 스미르넨스키 등이 여기 속한다.
 이들보다 나중 세대로서 반나치 저항운동중 순교한 젊고 재능 있는 시인 니콜라 바프차로프는 〈모터의 노래 Motorni pesni〉(1940)•〈시선집 Izbrani stihotvoreniya〉(1946) 등에서 사회주의와 기계문명시대의 도래를 환영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는 엘린 펠린과 요프코프의 산문이 탁월했으나 젊은 세대 작가들은 불가리아인의 삶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를 예술적으로 다듬었으며, 권위 있는 평론지 〈즐라토로크 Zlatorog〉(1920~44)등은 높은 문학수준을 유지했다.
 예술사가 니콜라이 라이노프는 중세 불가리아를 신비적•환상적으로 환기 시키면서 불가리아 신낭만주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엘리사베타 바그랴나는 전통시와 실험시를 훌륭히 융합한 시를 썼다.
 
    문학평론가 염무웅(69•영남대 명예교수)씨가 15년 만에 신작 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을 펴내며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무슨 일이든 벽에 부닥쳤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문학이 발 딛고 있는 출발점이자 바탕으로 돌아가서 작품과 시대현실의 관계를 살펴보자는 뜻을 이번 평론집의 제목에 담았습니다.”  불가리아 민족은 역사적으로 역경과 고난을 뚫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문학에도 그런 시련을 끈질기게 견디고 줄기차게 생존 투쟁을 거듭해 온 민족의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인상이 짙다고 볼 수가 있다.

참고문헌
    http://ask.nate.com/qna/view.html?n=8298750
http://blog.naver.com.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
http://mybox.happycampus.com/pom.
http://www.reportfly.co.kr/mall.
http://www.slovo.bg/selectauthor.
http://bg.wikipedia.org.